고대 이집트 시대의 미술, 아부심벨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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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고대 이집트 시대의 미술, 아부심벨 신전

by DDing선생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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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는

'서양미술사'의 저자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는 원시시대부터 이어진 인류의 미술 활동이 하나의 문화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된 것은 이집트시대부터였다고 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8000년부터 나일강 유역의 농경생활로부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3100년대 메네스왕이 上이집트와 下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이집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문명의 기틀을 닦은 고대 이집트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 수명을 다하고 로마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는데,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으로 이어진 고대 제국의 수명은 3000년이 넘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로 보면, 고조선이 건국된 기원전 2333년 이후 후기 신라시대로 넘어가던 수많은 역사의 우여곡절이 있었던 오랜 기간과 견줄 수 있는데, 그 긴 기간 동안 한 국가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통해 이집트라는 제국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고대 이집트가 과거 원시시대와 특별히 차이가 있는 부분 중에 하나는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신성문자는 오랫동안 상형문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으나, 1799년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 군에 의해 우연히 발견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을 통해 이집트 신성문자가 표음문자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후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집트의 엄청난 유산이 새로운 조명을 받았으며, '이집트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의미

고대 이집트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나일강이다. 나일강은 그 길이가 6700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장이면서 아프리카 내륙에 내린 비가 모여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들어 가는 통로라고 합니다. 그 긴 거리를 흘러가는 나일강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면서 그 주변지역을 옥토로 만들었다. 나일강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면 황량한 모래사막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을 보면 나일강 주변으로 비옥한 농토를 제공받은 이집트의 생존과 번영이 나일강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 당연하게 보인다. 

 

이런 나일강의 모습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신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나일강 인근의 비옥한 환경과 그 경계를 조금만 벗어나면 끊임없이 펼쳐지는 모래사막을 보면서 삶과 죽음, 풍요와 불모의 땅을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한다는 사실을 보면서도 인간의 죽음도 강물이 잦아드는 것만큼 일시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명도 영원할 것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인들의 이런 내세관이 고대 이집트 미술품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된 것이다.

 

나일강과 아부심벨 신전

아부심벨은 람세스 2세가 남긴 신전으로서 신이집트 왕국의 대표적인 역사적 유적이다. 

<아부심벨 신전의 전경, 출처: 나무위키>

람세스 2(Ramses II)는 고대 이집트 제19 왕조의 제3대 파라오로, 약 기원전 1279년에서 1213년까지 약 66년간 통치했던 위대한 왕으로 꼽힌다. 람세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등,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파라오 중 하나로서 '대왕'으로 불린다. 

 

람세스 2세는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시킨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를 통해 이집트가 유럽과 아시아 간의 중요한 교역로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람세스 2세가 확장시킨 많은 영토 중에서도 가장 공을 들인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아프리카 내륙의 누비아 지역이었다. 지금의 '수단'지역이다. 수차례의 원정 전투를 통해 정벌에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몰라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이런 누비아 인들에게 이집트의 위풍당당함을 보여주고, 자국의 군사들에게는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으로 누비아와 가장 가까운 아스완 지역에 아부심벨 신전을 건립하였다. 

 

아부심벨(Abu Simbel) 신전은 거대한 바위 사원이다. 신전 앞에는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좌상 4개가 누비아 쪽을 바라보면서 버티고 앉아 있습니다. 그 높이가 21미터 정도라고 하며, 만약 서있는 규모로 만들었다면 35미터 정도 되었을 거라고 추측되며, 람세스 2세 석상의 발치에는 부인 네페르타리와 그의 자녀들이 조각되어 있다. 람세스 2세는 애처가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大신전 옆에 小신전을 따로 지었을 정도이다.

 

또 아부심벨 신전의 내부에는 제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신전의 주인인 람세스 2세와 저승의 신 '프타', 태양의 신 '아문 라', 태양의 운행을 관장하는 '하라크테'의 조각이 안치되어 있다. 아부심벨 내부에는 일 년에 두 번 햇빛이 들어오는데 람세스 2세에게는 햇볕이 들어오는 반면, 저승의 신 프타에게는 빛이 비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이집트 인들의 수학적 계산능력과 세심하고 치밀함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부심벨 신전은 나일강의 범람을 고민했던 현대인들의 고민과 함께 그 유명을 달리할 뻔만 사연을 지니고 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발생되는 홍수가 그 주변의 민가에 큰 피해를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1902년에 아스완 댐을 건설했고, 부득이하게 1960년에 댐을 확장하는 공사가 계획되었다. 이 공사가 이루어지면 아부심벨 신전은 물속에 수몰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는 이 세계적인 유물을 지키기 위해 원래 있던 자리에서 60미터 정도 고도가 높은 장소로 이동하였다. 

 

그 거대한 신전과 석상들을 조각조각 내서 옮겨 재조립하는 과정이 쉽게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현대 건축 관련 기술과 인류의 노력으로 아부심벨 신전은 새로운 자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람세스가 앉아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현실적인 필요와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적절한 합의점을 찾은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집트 미술의 세계로

고대 이집트는 기록의 역사의 시작점이다. 그리스와 로마로 이어지는 서양미술사의 기초가 되며 현대 미술의 수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또한 피라미드 등에 남겨진 수많은 고대 이집트 유물들은 전 세계 도굴꾼과 정복자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 결과 그 역사적 유산이 흩어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남아있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흔적과 작품들은 여전히 빛을 발하며 후대에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제부터 하나씩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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