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시대 미술, 페르시아의 영광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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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메소포타미아 시대 미술, 페르시아의 영광과 미술

by DDing선생 202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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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시대는 수메르인이 세웠던 도시국가들로부터 아카드와 우르 왕조, 구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 아시리아 그리고 다시 신바빌로니아로 이어지며 다양한 민족들의 역사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를 일단락시켰던 건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아시리아도, 15만 명의 거대 도시국가를 이룬 신바빌로니아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를 하나로 통합하고 평화와 안정을 이룬 것은 바로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현대의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제국을 통칭하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50년부터 기원전 330년까지 220년간 이어졌던 아케메네스 왕조를 말한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최대 판도였을 당시 그 영토가 3개 대륙에 걸칠 정도의 대제국으로서,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일부 지역에서부터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흑해 연안의 대부분의 지역과 소아시아 전체에 달했다. 또 서쪽으로는 발칸반도의 트라키아, 현재의 팔레스타인 전역과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와 리비아에 이르는 광대한 땅덩어리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였다.  

 

페르시아가 이 거대한 지역을 정복하고 큰 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군사력이 우월한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등과는 전혀 다른 리더십을 보였는데, 소위 말하는 덕으로 제국을 통치했다고 할 수 있다. 200년이 넘는 왕조의 치세 기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왕으로 키루스 2세를 꼽을 수 있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 왕국과  소아시아를 점령하였고 기원전 539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강대국인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점령했던 위대한 왕이었다. 그의 유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키루스의 원통'이다. 

<키루스의 원통, 출처: 위키백과>

키루스의 원통은 키루스 2세의 업적을 기록한 원통형 기록물로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고도 한다. 이 원통은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페르시아로 편입하였을 때, 그의 명령으로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원통은 최대 지름이 22.5 센티미터의 통 모양의 구운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그 내부에는 큰 회색 돌이 포함되어 있다. 키루스의 원통을 발굴 당시에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두 개의 큰 조각을 합친 상태이다. 

 

이 원통에는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두크의 명령으로 신바빌로니아를 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백성들을 폭압적으로 다스리던 신바빌로니아의 독재자 나보니두스를 무찌르고 바빌로니아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신이 키루스 2세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바빌로니아 백성들도 키루스 2세를 환영했으며, 백성들이 그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를 도와달라고 신에게 기원했다고 남겨져있다. 그 외의 치적들이 기록된 것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키루스 2세가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진 대제국을 통치하는 방법으로 이런 유화적인 정책을 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심지어 종교의 자료도 허용했는데, 바빌로니아에서 박해를 받아왔던 유대교 역시 허락을 받았고, 이후 기독교로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기원전 520년경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던 다리우스 1세는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려 하였고, 터키 땅을 넘어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와 충돌을 하게 되고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고,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왕 시대에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는데, 우리에게 유명한 영화 <300>이 이 전쟁을 다룬 내용이다. 

<영화 300 포스터, 출처: 나무위키>

왕궁 도시, 페르세폴리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다양한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것 같이 페르시아도 여러 도시들을 만들었는데, 다리우스 1세 때에 새로운 수도가 된 페르세폴리스는 도시 전체가 왕궁인, 왕궁 도시로서 메소포토미아 도시 건축의 결정판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4만 평 정도의 규모로 추측되는 이 도시는 약 11미터의 단위에 세워졌는데, 오늘날로 표현하면 도시 전체가 3층 건물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졌던 것과 같은 것이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의 전경, 출처: 위키백과>

라마수가 지키고 있는 만국의 문을 지나면 대접견실과 100개의 기둥으로 채워진 궁전이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 다리우스 왕의 궁전과 보물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대접견실은 한 면이 60미터인 건축물로서 36개 기둥의 높이는 21미터에 이른다. 다리우스 왕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대접견실의 기단에는 36개 민족들의 특성을 반영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접견실로 향하는 계단 옆 벽에는 근위병들이 부조로 새겨져 왕과 도시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100개의 기둥이 세워진 궁전은 크세르크세스 1세 때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각 지역의 대표자들이나 군사 책임자들이 모여 회의나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추측되며, 나중에는 박물관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접견실 뒤쪽에는 왕과 왕비의 궁전이 있는데 받침의 조각 부분은 아직도 보전되어 있다. 중앙에는 궁전을 지키는 군인들이, 양쪽에는 동물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아시리아를 비롯한 다른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의 사실적인 표현에 비해 이곳의 조각은 정형화된 규칙에 맞춰 제작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페르시아 미술을 들여다보면, 페르시아는 정복지의 문화를 흡수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해 내는 연출력이 장점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 이미 있는 좋은 것들을 가져와 다시 재조합하는 능력이 이들이 남긴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페르세폴리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보면, 받침대 위로는 이집트 미술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파피루스의 문양을 볼 수 있다. 또, 그리스에서 유행했던 이오니아 양식과 이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양의 뿔 모양이 기둥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맨 위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건축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동물장식이 황소 모양이 얹혀있다. 이를 통해서도 페르시아의 건축과 미술이 이집트와 그리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가 융합된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집트와 그리스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호령했던 페르시아 대제국의 통합의 정치와도 유사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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