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미술, 왕가의 계곡과 투탕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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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고대 이집트 미술, 왕가의 계곡과 투탕카멘

by DDing선생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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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를 비롯한 이집트 미술의 위대한 작품은 파라오와 관련된 유적으로부터 많이 발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피라미드 시대를 지나 이집트의 새로운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와 유적들에 대해 알아보자.

 

피라미드의 제국이었던 고왕국은 외적의 침입이 심해지면서 아프리카 내륙 쪽으로 그 중심지를 옮기게 되었고, 그렇게 물러나서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은 곳이 바로 '테베'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고왕국의 중심지였던 기자, 멤피스로부터는 600킬로 미터가량 내륙 쪽으로 옮겨진 곳이다. 

<왕가의 계곡의 일부 전경, 출처: 위키백과>

왕가의 계곡

고왕국의 정수가 피라미드에 담겨 있었던 것처럼 신왕국을 대표하는 유적들도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신왕국 시대에 파라오의 무덤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나일강 서쪽, 죽음의 땅으로 구분되는 룩소르에 위치한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위치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을 기준으로 서쪽은 죽음, 동쪽은 생명의 땅으로 구분했었는데 이 왕가의 계곡에 터널식 석굴을 만들어 왕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 황량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막의 골짜기가 왕들의 무덤으로 건설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으로 약 500여 년간이었다. 신왕조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 투트모스 1세가 파라오로서 최초로 이 왕가의 계곡에 묻혔으며, 제20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가 마지막으로 묻혔다. 

 

이런 석굴 형태의 무덤으로 바뀐 데에는 횡행하던 도굴꾼들 때문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다수이다. 이집트 중왕국 때까지 유행하던 피라미드가 눈에 띄기 쉬운 건축물인 까닭에 도굴의 위험에 노출이 많다고 판단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인적이 드문 오지의 한적한 계곡이나 벼랑에 왕들의 무덤을 조성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이집트의 내세 사상에 따르면 먼 훗날 언젠가 자신의 몸으로 되살아날 수 있지만, 그전까지는 영혼도 제사로 제공되는 음식을 먹고살아야 하므로 제사를 바치는 신전에 주기적으로 오가야 했기에, 이렇게 오지에 이들의 무덤을 지었던 데에는 큰 결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수십 개에 달하는 이곳의 무덤들도 대부분 도굴을 당하면서 원래 피라미드를 포기하고 이런 형태를 선택한 효과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세사상이 강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렇게 거의 모든 왕의 무덤을 도굴했다는 것은 조금 의아한 일이다. 하지만, 이집트 제국의 재정이 약해지고, 무덤 제작에 동원되었던 이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잦아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도굴이 만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왕들의 주요한 업무 중에 하나가 도굴된 무덤을 보수하고 재건하는 일이었다고 하니 산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투탕카멘의 장례용 황금 마스, 출처: 나무위키>

투탕카멘의 유적

왕가의 계곡에 있는 모든 무덤들이 도굴의 피해를 입었던 것에 비해 유일하게 도굴꾼의 만행이 거의 없는 채로 발견된 곳이 있다. 그 무덤은 바로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고만 비운의 소년 왕, 투탕카멘(Tutankhamen)의 무덤(KV62)이다. 이집트 관련 여러 가지 이야기에 소재로 등장하는 투탕카멘은 아크나톤(또는 아멘호텝 4세)의 아들이다.

 

그는 현대인들에게는 고대 이집트 왕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왕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앞서 재위했던 아크나톤이 정치, 종교적으로 개혁을 단행하면서 촉발된 제사장들과의 갈등에 따른 희생양으로 알려져 있다(아크나톤은 3000년간 이어져온 이집트의 다신교를 태양신 아톤만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아크나톤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투탕카멘은 제사장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짧은 재위기간 동안 이용만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은 추측이 남아있다.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과 함께 파라오로서의 실제적인 존재감 또한 약했고, 그러다 보니 무덤도 별로 좋지 않은 위치에 조성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도굴꾼의 관심에서 멀어져 그의 무덤이 잘 보전될 수 있었던 역사의 아이러니를 또 볼 수 있다. 

 

암튼 그렇게 유일하게 보전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투탕카멘 미라의 얼굴 위에 얹어 놓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무덤 중 제5번 방에서 출토되었는데, 5중으로 된 관을 다 연 후에야 황금 마스크를 쓴 투탕카멘의 미라를 마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눈에 봐도 찬란한 금빛과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치장된 그의 마스크를 보고 있으면, 3000년 전의 사람들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높이 54센티미터, 너비 44센티미터의 규모의 이 가면은 황금 11킬로그램과 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되는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와 흑요석, 대리석 등으로 제작되었다. 머리 부위에는 하 이집트의 상징인 코브라와 상 이집트의 상징인 대머리독수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모든 이집트의 상징이 파라오를 보호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왕족만이 기를 수 있는 턱수염과 그 주머니를 통해 파라오의 마스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된 투탕카멘의 유물들은 모두 이집트 박물관으로 즉시 보내져서 지금까지 그곳에서 이집트를 상징하는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이외에도 그의 무덤에서 함께 발굴된 궤짝은 전차를 타고 용맹하게 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황금으로 만들어진 의자는 팔걸이에는 날개를 펼친 독수리, 팔걸이 아래에는 수사자의 얼굴이 그리고 의자 다리는 수사자의 다리로 만들어져 의자가 어디까지 화려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투탕카멘의 황금 의자, 출처: ienzo>

도굴의 아쉬움

투탕카멘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의 무덤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것에 해당되는데 그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만 가지고도 이집트 박물관을 다 채울 정도라고 한다. 세티 1세의 무덤의 경우 투탕카멘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약 6배나 큰 규모라고 하는데 만약 그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부장품들이 보존되어 있었을까? 또 다른 많은 무덤과 피라미드의 유물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전해졌다면 인류의 역사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시각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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